한국 대기업이 가전을 버리는 이유 — 집이 작아지고 있다

 

삼성의 ODM, SK의 철수, 그리고 LG가 남은 이유

인테리어 현장에서 일한다. 빌트인 가전 사양을 협의하고 현장에 설치되는 기기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있다. 삼성 빌트인이 들어오는 현장이 줄었고, LG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SK매직을 스펙에 올리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숫자가 말하기 전에, 현장이 먼저 말하고 있었다.

삼성전자가 가전사업 재편에 나섰다. 2026년 4월, DA사업부는 타운홀 미팅에서 방향을 밝혔다. 식기세척기와 전자레인지 생산라인 폐쇄, 외주 전환(ODM), 말레이시아 공장 폐쇄, 중국 가전 시장 철수 검토. 요약하면 이것이다. 직접 만드는 것을 줄이고, 프리미엄에 집중하며, 나머지는 외부에 맡긴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삼성 비스포크 식기세척기는 2006년부터 중국 메이디(Midea) ODM이다. 벽걸이 에어컨도 TCL ODM 제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삼성이 디자인하고, 중국이 만들고, 삼성 로고를 붙인다. 비스포크라는 브랜드 아래. 같은 메이디 제품을 쿠쿠가 절반 가격에 팔고 있다는 사실이 소비자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됐다.

SK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2016년 동양매직을 인수해 SK매직으로 이름을 바꿨다. 2023년 가전사업부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2024년 1월 가스레인지·전기레인지·전기오븐 사업권을 경동나비엔에 370억 원에 넘겼다. 3월엔 식기세척기도 단종. 2025년 7월 사명이 SK인텔릭스로 바뀌었다. 이제 SK매직은 정수기·공기청정기·비데만 남은 회사가 됐다. AI 웰니스 플랫폼이라는 새 정체성을 내세우며.

동양매직을 인수한 지 8년 만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숫자로 들어가면 그림이 선명해진다.

KDI가 분석한 결과, 소득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면서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간소비 증가율이 평균 0.4%p씩 떨어져왔다. 실질 GDP가 1% 오를 때 실질 민간소비는 0.74%만 증가한다.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지갑을 여는 속도가 더 느리다는 뜻이다.

2023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1.4%. 같은 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대 후반. 실질 구매력은 후퇴했다. 코로나19 이후 회복됐다는 경제지표와 달리, 민간소비 증가율은 1%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빈 공간을 정부 소비가 채우고 있어 전체 수치는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간의 지갑은 실질적으로 닫혀가고 있다.

KDI는 2025~30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1%대 중후반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2001년 6%에 육박하던 숫자가 20년 만에 4분의 1이 됐다.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줄고, 총요소생산성 증가율도 하락한다. 경기 사이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부동산과 가전은 연결돼 있다. 이사를 하면 가전을 바꾼다. 재건축·리모델링 사이클이 빌트인 교체 수요를 만든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연결고리를 체감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국 주택 거래량은 2021년을 정점으로 급격히 냉각됐다. 상업용 부동산 거래량은 2021년 9.6만 건 고점에서 2024년 4.6만 건으로 3년 연속 감소했다. 거래가 줄면 이사가 줄고, 이사가 줄면 가전 교체가 줄고, 가전 교체가 줄면 내수 시장이 수축한다.

1~2인 가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선 나라에서, 합계출산율이 0.7 아래로 내려간 나라에서, 60㎡ 이하 소형 주택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에서 — 대형 양문형 냉장고와 대용량 드럼세탁기의 국내 내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중국 가전 업체의 추격과는 별개의 구조적 이야기다.

삼성 경제연구소는 이 흐름을 누구보다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조직이다. 삼성이 국내 중저가 가전 생산을 ODM으로 돌리고 중국 시장 철수를 검토하는 결정이 단순히 수익성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더 긴 시간표 위에서 내수 시장 자체의 수축을 예견한 결정인지 — 그 둘은 구분할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수익성이다. 중국 가전 업체의 추격으로 중저가 시장 경쟁이 격화됐고, 원재료비와 인건비와 물류비가 동시에 올랐다.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대형 프리미엄 가전은 마진이 남지만, 전자레인지와 식기세척기 같은 중소형 범용 가전은 중국산과 가격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됐다.

그 결과 삼성이 선택한 방향은 제조에서 플랫폼으로의 전환이다. SmartThings는 삼성 기기뿐 아니라 타사 기기도 연결한다. 기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파는 전략. 어떤 기기가 삼성이 만든 것인지, 메이디가 만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SmartThings의 생태계 확장성과 안정성은 실제로 인정받고 있다. 애플 홈킷, 구글 홈과의 연동도 가능하고 Matter 표준을 지원한다.

LG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LG전자는 아직 국내 자체 생산 비중이 높다. 창원 공장이 여전히 돌아간다.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식기세척기 — 주요 제품군의 국내 생산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LG의 강점이기도 하고, 비용 부담이기도 하다.

문제는 ThinQ다. LG의 IoT 플랫폼. 기능 자체는 나쁘지 않다. LG 기기들을 연결하고 제어하는 기술적 완성도는 갖춰져 있다. 그런데 UI가 직관적이지 않고, 앱이 무겁고, 연결이 끊기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불만이 누적돼 있다. 경쟁사 플랫폼과의 연동도 SmartThings에 비해 제한적이다.

LG는 2024년 네덜란드 스마트홈 플랫폼 기업 앳홈(Athom)을 인수했다. 5만 종 이상의 가전·IoT 기기를 연결하는 스마트홈 허브 ’호미(Homey)’를 보유한 회사다. ThinQ의 폐쇄성을 앳홈의 개방형 생태계로 보완하겠다는 전략이다. 2021년에는 별도로 미국 광고·데이터 분석 업체 알폰소(Alphonso)를 인수해 webOS 광고 플랫폼 사업을 확장했다. 방향은 맞다. 그 투자가 실제 ThinQ 사용 경험의 개선으로 이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아직 보류 상태다.

가전을 고르는 사람이 브랜드보다 플랫폼을 먼저 보는 시대가 왔다. 이 집에 이미 어떤 기기가 있고, 어떤 생태계에 연결돼 있는가. 그 맥락 안에서 새 기기를 고른다. LG가 좋은 세탁기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다.

건설 현장에서 보면 이 변화가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빌트인 사양을 협의할 때 점점 더 많이 나오는 질문은 “어디서 만든 거예요?“가 아니라 “이게 기존 시스템이랑 연결돼요?“다.

가전이 가전이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집 안의 기기들이 서로 연결되고, 데이터를 주고받고,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하는 시대.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의 싸움을 지금 삼성, LG, 그리고 애플, 구글이 하고 있다.

SK는 그 싸움에서 빠져나왔다. 가전에서 헬스케어 렌탈로.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의 집이 작아지고 있고, 거래는 줄고 있고, 지갑은 닫혀가고 있다. 그 안에서 누가 살아남는가는, 더 좋은 냉장고를 만드는 쪽이 아니라 더 촘촘한 생태계를 만드는 쪽이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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